2026년 3월 15일 일요일

[오늘의 핫이슈]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압박과 중동의 위기

이탈리아 매체 Officina dei saperi(원출처 La Fionda)의 칼럼은 현재 중동 사태를 바라보는 이탈리아 지식인 사회의 날카로운 시각을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블로그의 첫 이슈로 이 내용을 정리해 본다. 

원문: FARE PAURA! La guerra usraeliana all'Iran: l'azzardo e le illusioni (14.03.2026. Mario Barbi 작성)

https://www.officinadeisaperi.it/agora/il-senso-delle-parole/fare-paura-la-guerra-usraeliana-alliran-lazzardo-e-le-illusioni-da-la-fionda/



📰 공포감을 조성하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압박과 중동의 위기

오늘 다뤄볼 이슈는 이탈리아의 정치·사회 매체에 실린 마리오 바르비(Mario Barbi)의 칼럼이다. 저자는 현재 이란을 둘러싼 미국과 이스라엘의 강경한 행보를 "Usraeliana(미국 US + 이스라엘 Israel의 합성어)"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이를 '무모한 도박'이자 '환상'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칼럼이 짚어낸 핵심 포인트 3가지를 정리하면, 


1. 패권 유지를 위한 무기: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Fare Paura)" 

미국은 현재 세계적인 자신의 영향력을 축소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확장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저자는 미국이 세계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세계에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중동의 석유 통제권을 쥐고 흔듦으로써 중국이나 인도 같은 경쟁국들을 견제하고, 나아가 달러화의 세계적 패권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2. 맹목적인 시온주의와의 위험한 동맹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미국이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메시아적 시온주의(Messianic Zionism)'와 자국의 이익을 완벽하게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들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마치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것처럼, 요르단강에서 지중해(심지어 유프라테스강)까지 아우르는 '대이스라엘(Grande Israele)'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3. 오만한 제국주의 시대로의 퇴행 

강대국들의 행보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중동을 마음대로 분할 통치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오만한 위임통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우리가 아직도 그 시대가 남긴 비극적인 결과의 대가를 치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문명이 여전히 국제법과 보편주의를 내팽개친 채 지배와 일방주의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고 꼬집는다.


레반트(동지중해)와 페르시아(이란) 지역은 과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중심지이자, 마르코 폴로의 발자취와 프라 마우로 지도의 핵심 무대였다. 수백 년 전 상인과 탐험가들의 활기가 넘치던 이 땅은 오늘날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과 공포 정치가 얽힌 화약고가 되었다.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명 간의 진정한 대화'는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2026년 3월 14일 토요일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살루테] 성화에 얽힌 전설과 대성당

 성 마르코 대성당 앞 바닷가에 서서 보면, 건너편에 큰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이 있다. 그 안에는 틴토레토, 티치아노 등의 작품도 있지만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공경받던 마리아 성화가 하나 있다. 이 성화에 얽힌 이야기를 해 보겠다. 

원래 성화는 17세기 후반, 베네치아와 그리스 섬들과 있었던 많은 전쟁의 아픔을 안고 크레타에서 가져온 것으로, 후에 베네치아를 휩쓸었던 최악의 흑사병이 끝난 것을 감사하며 지은 '살루테 대성당'의 의미와 맞물려 베네치아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성화로 이어졌다. 


📜 마돈나 델라 살루테 (Madonna della Salute : 건강/구원의 성모)

1670년 11월, 이 대성당에 안치된 '마돈나 델라 살루테' 성화(이콘)는 원래 칸디아(Candia, 현재의 크레타섬) 대성당에서 온 것으로, 그곳에서는 '산 티토의 성모' 또는 '메소판디티사(Mesopanditissa: 성탄절과 예수 성전 봉헌 축일 사이에 축일이 치러진 데서 유래)'로 알려져 있었다.

칸디아 전쟁(크레타 전쟁) 말기 튀르크(오스만 제국)와 맺은 평화 조약 이후, 모로시니(Francesco Morosini) 장군은 이 성화를 베네치아로 가져왔다. 이는 총사령관이었던 그와 칸디아 섬에 살던 베네치아 주민들이 이 이콘에 대해 가졌던 아주 깊은 신앙심 때문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성화는 복음사가 성 루카가 그렸다는 둥, 루카가 의사였기에 인물묘사를 디테일하게 하여 루카 전통으로 알려졌다는 둥의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기적의 성화라 일컫는 '아케로피타(Acheropita, "기적적인 기원을 가진 진짜 성화")'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12세기에 성모 마리아 성화를 전문으로 그리던 화가인 '마도네로(madonero)'가 그린 작품이다.

1922년, 이 성당이 교황청으로부터 '바실리카 미노레(Basilica minore, 소성당)'의 지위를 부여받으면서 성화에 왕관이 씌워졌다.

그늘진 얼굴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 깊은 여운을 준다. 1959년 라차리니(Lazzarini) 교수에 의해 훌륭하게 복원되었다.




📝 성화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

성화는 베네치아 역사와 맞물려 회자되던 작품이다. 

1. 오스만 제국을 피해 베네치아로 온 '피란민 성모님'

  • 성화는 처음부터 베네치아에 있던 것이 아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중해의 핵심 거점이었던 크레타섬(칸디아)을 두고 오스만 제국과 20년이 넘는 처절한 전쟁을 벌였고, 결국 패배하여 섬을 내어주게 되었다. 철수하던 모로시니 장군이 베네치아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 이콘을 소중히 챙겨서 베네치아로 돌아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는 화려한 전리품이 아니라,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피란민'과 같은 사연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2. 전설과 팩트 체크: "진짜 성 루카가 그렸을까?"

  • 중세 시대에는 유명한 성화들을 '복음서 저자인 성 루카가 직접 그렸다'고 믿는 경우가 많았다. 이 안내판 역시 흥미롭게도 전설(성 루카가 그림)과 팩트(12세기 이름 모를 전문 화가가 그림)를 모두 친절하게 적어두고 있다. 사람들에게 "옛날 사람들은 이 그림이 기적의 그림이라고 믿었어요!"라고 소개하며, 당시의 순수한 신앙심과 현대의 과학적 연구 결과를 비교하기도 한다.

3. 비잔틴 예술의 신비로움: "그늘진 얼굴과 꿰뚫어 보는 눈빛"

  • 안내판의 마지막 문장처럼 그림의 매력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사한 성모 마리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있다. 짙은 금빛 배경에 약간 어둡고(adombrato) 엄숙한 표정, 관객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빛(occhi penetranti)을 지니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영향을 받은 비잔틴 양식 특유의 신비롭고 영적인 느낌을 시각적으로 잘 전달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아래사진: 성화가 있는 제단




2026년 3월 13일 금요일

[베네치아, 마르챠나 도서관] 프라 마우로의 세계지도

 프라 마우로의 세계지도 (Fra' Mauro Mappamondo) 

베네치아의 마르챠나 도서관 박물관에 가면 진귀한 자료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신대륙 발견 이전에 나온 세계지도가 하나 있다. 그것도 전문 항해사나 국제무역을 하던 상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수도생활을 하던 한 수사가 베네치아를 찾던 수많은 외지인과 동향인들의 입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여 제작한 것이어서 당시 베네치아가 얼마나 번성했는지, 그 시대의 세계관, 사고방식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세계지도는 중세 후기 지도 제작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념비적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지도를 설명하기에 앞서, 저자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기로 한다. 이탈리아어로 프라 마우로(Fra Mauro, 1400년경~1464년)는 '마우로 수사'라는 뜻이다. 아래 사진은 위키백과 참조.




🌊 프라 마우로와 베네치아: 15세기의 빅데이터 센터

프라 마우로는 베네치아 석호에 있는 여러 섬들 중,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같은 유명인들이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 섬, '산 미켈레(San Michele)' 수도원의 카말돌리회 수사였다. 그는 직접 배를 타고 험난한 바다를 누빈 탐험가였을까? 전혀 아니다. 그는 평생 수도원 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은 '방구석 여행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수도원 방 안에 앉아 당대 최고의 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베네치아'라는 도시의 공간적 특수성에 있다. 1450년대 베네치아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이자 해상 제국이었다.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를 다녀온 상인, 선원, 외교관들이 모두 베네치아 항구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프라 마우로는 베네치아라는 거대한 '15세기 빅데이터 센터'의 최고 분석가였다. 그는 항구를 거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끈질기게 인터뷰했고, 아랍의 지리서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 지도를 완성했다.


📜 지도의 역사적 배경

이 지도는 당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려 혈안이 되어 있던, 포르투갈의 국왕 알폰소 5세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의뢰로 제작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찾고 있었고, 가장 정확한 최신 정보가 절실했다. 바로 이 세계지도가 탄생한 경위다. 

지도가 갖는 역사적인 가치는 중세의 맹목적인 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세계관으로 넘어가는 결정적 전환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전의 중세 지도들은 무조건 예루살렘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에덴동산을 지도 한가운데 크게 그렸다. 하지만 프라 마우로는 철저히 상인들의 증언과 실제 지리를 바탕으로 지도를 그렸고, 신학적 상징인 '지상 낙원'은 지도 밖 액자 모서리로 밀려났다.

물론 신대륙이 발견되기 훨씬 전에 그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세계'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육지는 바다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고, 남쪽이 위를 향하고, 원둘레를 따라 8개의 방위표(나침반 장미)가 배치되어 있다.

마우로 수사는 지도, 역사, 문학, 구전 기록 등 방대한 출처를 활용하고, 수많은 언어를 놀랍게 통합해 냈다는 점에서 이전의 지도 제작 전통과 뚜렷이 구별된다. 지도상의 공간은 수백 개의 이미지와 베네치아 방언으로 쓰인 약 3,000개의 비문으로 채워져 있다. 여기에는 정보, 관찰 내용, 작가의 주석 등이 담겨 있어 고전, 후기 라틴어 및 중세 작가들의 저술에 대한 그의 깊은 지식을 보여준다.

액자의 네 모서리에는 레오나르도 벨리니(Leonardo Bellini)가 세밀화로 그린 '지상 낙원(Paradiso terrestre)'과 함께 우주론적인 묘사와 주해들이 자리 잡고 있다.

베네치아, 약 1450-1460년. 목판에 양피지, 필사본. 평면 구체도 196 x 193 cm, 액자 포함 223 x 223 cm.


📜 지도에 담긴 재미 있는 포인트

1. "지도의 위아래가 뒤집혀 있다? 남쪽이 위를 향하는 지도!"

현대인들에게 지도는 당연히 북쪽이 위지만, 이 지도는 남쪽이 위를 향하도록(orientato a Sud) 그려져 있다. 왜 중세 사람들은 지도를 이렇게 거꾸로 그렸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권력이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흥미로운 열쇠가 된다.

🧭 왜 지도의 위쪽이 북쪽이 아니었을까?

현대인들은 '위=북쪽'이라는 공식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지도에서 어느 방향을 위로 두느냐는 철저히 '그 지도를 만든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했는가'에 따라 달랐다.

# 초기 중세 그리스도교 지도: "가장 중요한 에덴동산(동쪽)이 위로 가야지!" 프라 마우로 이전의 전형적인 중세 유럽 지도(일명 TO 지도)들은 대부분 동쪽(East)이 위를 향했다. 왜 그랬을까? 해가 뜨는 동쪽에 하느님이 창조한 '지상 낙원(에덴동산)'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 깨알 상식: 우리가 길이나 방향을 잡는다는 뜻으로 쓰는 단어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동쪽을 뜻하는 '오리엔트(Orient)'를 지도의 위쪽에 맞추는 행위에서 유래한 말이다!

# 프라 마우로의 지도: "최첨단 아랍 과학을 따라 남쪽(South)을 위로!" 그렇다면 프라 마우로는 왜 동쪽도 북쪽도 아닌 남쪽을 위로 그렸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 아랍 지도 제작술의 영향: 당시 유럽보다 지리학과 천문학이 훨씬 발달했던 곳이 이슬람 세계였다. 12세기, 위대한 아랍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Al-Idrisi)를 비롯한 아랍 학자들은 주로 남쪽을 지도의 위에 두었다. 프라 마우로는 낡은 종교적 관습(동쪽이 위)을 버리고,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아랍의 과학적인 지도 제작 데이터를 적극 수용했기 때문에 남쪽을 위로 둔 것이다.

  •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 당시 유럽의 최대 관심사는 '아프리카(남쪽)를 우회해서 인도로 가는 바닷길이 있는가?'였다. 사람들의 시선과 호기심이 온통 남쪽을 향해 있었던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 그럼 언제부터 북쪽(North)이 위로 고정되었을까? 우리가 아는 '북쪽이 위인 지도'가 표준이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발명품 덕분이다.

  • 나침반의 대중화: 15세기 이후 대항해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항해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는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자기 나침반'이었다. 항해사들이 나침반을 보며 지도를 읽기 편하도록 북쪽을 위로 두기 시작했다.

  • 프톨레마이오스의 귀환: 고대 그리스의 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지리학』이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으로 다시 번역되어 들어왔는데, 이 책에서 북쪽을 위로 두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것이 인쇄술과 결합하면서 지금의 '북쪽=위' 공식이 유럽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결국 프라 마우로의 지도는 '신앙 중심의 세계(동쪽이 위)'에서 '과학과 탐험의 세계(북쪽이 위)'로 넘어가는 아주 역동적인 과도기에, 최첨단 아랍 과학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걸작인 셈이다.


2. "3천 개의 베네치아 사투리가 적힌 중세의 빅데이터"

단순히 지형만 그린 것이 아니라, 베네치아로 몰려드는 전 세계의 상인과 선원들의 입을 통해 생생한 목격담을 모아 3,000개가 넘는 정보를 빼곡히 적어 넣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15세기의 실리콘밸리'였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몰랐던 시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치밀하고 다채롭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깨알 같은 베네치아 사투리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기록하였기에, '중세판 구글 어스' 나 다름없었다고 하겠다. 

놀라운 것은 아프리카 대륙의 맨 아래쪽에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기 수십 년 전이지만, 이 지도에는 이미 '아프리카를 삥 돌아서 바다로 갈 수 있다'고 그려져 있는 것이다. 당시 대항해 시대를 준비하던 포르투갈 왕이 이 지도를 거액을 주고 주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대륙이 발견되기 약 30~40년 전에 나온 지도라는 걸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래사진: 베네치아, 마르챠나 도서관 내부

[베네치아, 마르챠나 도서관] 상인 마르코 폴로의 유언장

 베네치아, 마르챠나 도서관 박물관에는 마르코 폴로의 "유언장"이 있다. 2017년 스크리니움 출판사에서 인쇄한 오리지널 양피지, 675 x 238 mm 의 복제본으로 내용을 충분히 읽을 수 있게 전시되어 있다. 유언장 내용에 관한 이야기에 앞서 이 도서관 박물관에 대해 간략하게 먼저 언급하기로 한다.


마르챠나 도서관 박물관

1453년 동로마가 셀주크 오스만투르크의 메흐메트 2세에게 멸망하고, 정책에 따라 이슬람으로 전향하지 않은 많은 고위 성직자와 지성인들은 유럽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때 수많은 고전 고서들이 베네치아에 도착했고, 그 즈음 마르챠나 도서관이 설립되었다. 엄청난 보물단지들은 현재 베네치아 고고학박물관과 도서관으로 옮겨져 건물만 남아 있다.

마르챠나 도서관 내부 전경


바로 이곳에 흥미로운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마르코 폴로의 유언장"이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사망 1년 전에 공증인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의 도움으로 작성한 이 유언장을 통해 그의 삶의 자취와 사고방식을 엿볼 수가 있다.   



📜 마르코 폴로 유언장의 실제 주요 내용

1. 타타르인 하인 '피에트로'의 해방과 유산 상속 

유언장 초반부에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타타르인 하인 피에트로(Pietro)를 언급한다. 그를 노예 신분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줄 것을 명시하며, 그가 독립할 수 있도록 100 베네치아 리라(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를 유산으로 남겼다. 아시아 여행에서 데려와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에 대한 깊은 애정과 책임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장지와 기부금 지정 

그는 자신의 시신을 아버지가 묻힌 성 로렌초(San Lorenzo) 성당에 안치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베네치아의 여러 성당, 수도원, 병원, 심지어 나병 환자 수용소와 고아원에까지 재산을 기부하라고 꼼꼼하게 지시한다.


3. 통 큰 빚 탕감 

마르코 폴로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베네치아의 상인이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관대했다. 유언장에는 자신의 친척들이나 지인들이 자신에게 졌던 특정 빚들을 모두 탕감해 주고 면제해 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4. 막대한 부의 상속 

기부금과 피에트로의 몫을 제외한 남은 재산 - 이것도 엄청남 - (동방에서 가져온 보석, 비단, 금, 향신료에 이어  무엇보다도 쿠빌라이 칸이 선물한 '순금 여권(패자)' 등)은 모두 아내 도나타 바도에르(Donata Badoer)와 딸 판티나(Fantina), 벨렐라(Bellela), 모레타(Moreta)에게 공동으로 상속했다. 중세 시대에 남성 후계자나 다른 친척을 배제하고 여성 직계 가족에게만 모든 권리를 넘긴 것은 그의 또 다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절, 남자는 무슨 일이나 할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궁지에 몰리면 할 만한 일이 딱히 없었다. 특히 상업도시 베네치아에서는 매춘 외에 여성이 품위를 유지하며 할 만한 일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마르코 폴로는 이점을 걱정했던 것 같다. 아내를 비롯해서 딸이 많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가 일으켜 놓은 사업의 번성보다도 가족들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에서 숙연한 마음이 든다.


분명한 것은 이 문서를 통해 마르코 폴로가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아시아를 여행한 기록인 동방견문록(Il Milione)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베네치아의 상인이자 여행가다

이 문서가 지리학 관련 전시관에 소개된 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다음 포스팅에서 언급하게 될 프라 마우로(Fra' Mauro)의 세계지도와 함께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15세기와 16세기 지리학자들의 가장 주요한 정보 출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핫이슈]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압박과 중동의 위기

이탈리아 매체 Officina dei saperi (원출처 La Fionda )의 칼럼은 현재 중동 사태를 바라보는 이탈리아 지식인 사회의 날카로운 시각을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블로그의 첫 이슈로 이 내용을 정리해 본다.  원문:  FARE PA...